Tartini, Violin Sonata No.4 in G minor
'Devil's Trill'
타르티니 바이올린 소나타 4번 '악마의 트릴'
Giuseppe Tartini
1692-1770
“1713년 그는 어느 날 밤 악마와 계약을 하는 꿈을 꾸었다. 악마는 모든 조건을 들어주기로 약속했고, 그는 자신이 생각하는 것은 무엇이든 이룰 수 있게 되었다. 그의 소원은 모두 실현되었고, 새로운 시종은 그의 욕망을 모두 충족시켜주었다. 그는 악마가 어떤 음악을 연주하는지 알고 싶어 악마에게 자신의 바이올린을 건네주었다. 악마가 솔로 바이올린을 월등한 기량으로 정확하게 연주하며 아름다운 소리를 만들어내는 모습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가 평생토록 꿈꾸어 왔거나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그러한 음악이었다. 순간 그는 몹시 놀랐지만 한편으로는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기쁜 나머지 숨을 쉴 수조차 없었다. 그는 충격에서 벗어나 즉시 바이올린을 들고 방금 전 자신이 들은 것을 악보로 옮겨 보았다. 그러나 결국엔 헛된 일이었다. 그는 자신의 작품 가운데 가장 훌륭한 작품인 <악마의 소나타>를 작곡할 수 있었지만 꿈에서 들었던 악마의 감동적인 음악에는 훨씬 미치지 못했다. 그는 다른 일을 하며 살아갈 수만 있다면 자신의 악기를 깨부수고 영원히 음악을 포기하고 싶다고 말했다.”
주세페 타르티니와 그의 유명한 바이올린 소나타에 대한 이러한 일화는 영국의 찰스 버니(Charles Burney)가 1771년에 작성한 음악기행집인 <프랑스와 이탈리아 음악의 현황>에 등장하는 것이다. 타르티니의 이 일화는 버니에 의해 기록되기 이전부터 유럽 전역에 널리 퍼져 있었다. 타르티니는 이런 괴상한 소문이 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방관했거나 혹은 더 널리 퍼지는 데 일조한 것 같다. 프랑스의 천문학자인 장-자크 드 랄랑드(Jean-Jacques de Lalande)가 1769년에 출판한 자신의 여행일지에 이미 이 환상적인 이야기가 적혀 있었고, 당시 프랑스의 살롱에서도 이 이야기가 화제에 올랐던 것을 미루어보면, 적어도 당시 생존해 있던 타르티니가 이 이야기에 아무런 제재나 반박을 하지 않았음이 분명하다
시간이 한참 지난 뒤인 1892년 러시아의 작가 헬레나 페트로브나 블라바츠키(Helena Petrovna Blavatsky)가 불가사의한 일들을 책으로 엮은<[악몽 이야기>에 타르티니 일화가 다시 등장한다. 이보다 앞선 1828년에는 ‘악마의 바이올리니스트’라고 일컬어진 니콜로 파가니니에 대한 괴담이 유행했다. 파가니니가 유럽 순회공연의 첫 출발지였던 빈에서 공연을 갖기 전부터 그의 메피스토펠레적인 연주가 악마와 계약을 맺은 대가라는 소문이 급속도로 퍼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흥미롭게도 위대한 연주가이자 탁월한 바이올린 소나타와 협주곡을 작곡한 비발디에게는 이런 악마와 바이올리니스트를 연관 짓는 유사한 소문이 발생하지 않았다. 아마도 그가 사제라는 직함을 갖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자기 홍보적 성격이 강한 이 이야기가 사실이든 혹은 단순히 그럴 듯하게 지어낸 이야기든, 비르투오소 바이올린 연주자들과 계약을 종용한 악마, 이들이 만들어낸 악마적인 예술 사이의 신비로운 삼각관계는 역사적 사실 만큼이나 확고한 것으로서 결코 깨뜨릴 수 없는 성역이 되었다. 그러나 여기에 더욱 중요한 점이 있다. 타르티니의 <바이올린 소나타>가 오랜 시간 동안 사랑을 받으며 불멸의 명성을 얻게 된 것은 작곡가의 현명한 비즈니스적 판단뿐만 아니라, 당시의 평균적 음악 수준을 훨씬 뛰어넘는 진취적이며 고매한 음악성이 있었기에 가능했다는 사실이다.
많은 작품을 남긴 타르티니의 삶에서 ‘악마적’이라고 단정할 수 있는 부분은 찾아보기 힘들다. 그는 1692년 이탈리아의 도시인 트리스테 근교에서 태어났다. 1709년부터 파도바와 아시시에서 공부를 한 그는 원래 법학을 전공했으나 1710년 젊은 엘리자베타 프레마초레와 비밀리에 결혼을 한 뒤 아시시와 안코나에서 오케스트라의 바이올린 연주자로 생계를 꾸려나갔다. 당시 그는 청중들의 이목을 끌기 위해 남들보다 훨씬 화려한 연주효과를 사용해야 했다. 그래서 그는 이러한 경험을 바탕으로 <악마의 트릴>과 같은 극적 효과와 빼어난 테크닉이 담긴 소나타를 작곡할 수 있었다고 유추해 볼 수 있다.
1721년 이탈리아 파도바에 위치한 성 안토니오 바실리카의 수석 바이올린 연주자로 임명된 타르티니는 많은 음악을 작곡함과 동시에 많은 음악저서를 남겼다. 장식법에 관한 <아포지아투라론>을 비롯하여 저 유명한 <막달레나 롬바르디니에의 편지>, 가장 중요한 저서로 손꼽히는 <화성론> 등을 출판했다. 후일 프랑스의 사상가 루소는 그의 음악사전에서 타르티니의 이론을 라모의 것으로 대치시켜 “라모는 저음부에 의해 고음부를 만들었다. 한편 타르티니는 고음부에 의해 저음부를 만들었다”라고 말한 바 있다. 이는 타르티니의 경우 선율에서 화성을 끌어내나는 사실을 말하는 것이다. 특히 타르티니의 이론서들은 레오폴트 모차르트가 바이올린 교습을 하기 위한(아들인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도 이를 배웠을 것이 분명하다) 기본적인 교과서로 사용했다.
Ida Haendel, Tartini sonata Devil's Trill (4.)Prague
타르티니는 1770년 세상을 뜰 때까지 많은 종교곡을 비롯하여 약 135개의 바이올린 협주곡, 다수의 바이올린 소나타, 바이올린이 제외된 작품들 등 다양한 작품을 작곡했다. 이 가운데에서 단연 23세의 타르티니가 작곡한 바이올린 소나타 G단조 ‘악마의 트릴’이 가장 유명하다. 당시로서는 최고 수준의 테크닉을 요구하는(지금 기준으로도 여전히 그러하다) 작품으로서, 당시 사람들은 이 작품을 연주하는 타르티니의 왼손 손가락이 여섯 개라고 생각했다. 이 또한 악마와의 거래에 의한 부산물인 셈이다. 당시의 음악이 대부분 그러하지만, 연주법에 있어서 바로크 악기와 현대 악기 사이의 차이가 큰 탓에 현대의 많은 연주자들은 크라이슬러가 편곡한 버전을 많이 사용했고 최근에야 비로소 바로크 악기로 오리지널 버전을 자주 연주할 수 있게 되었다.
글 박제성(음악칼럼니스트)
출처: 꽃별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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